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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호, "작은 것이 아름답다"책 읽는 즐거움 2025. 2. 25.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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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호, "작은 것이 아름답다: 시, 깊고 넓게 겹쳐 읽기"(2019)
"작은 것이 아름답다: 시, 깊고 넓게 겹쳐 읽기"(2019)는 유종호 교수의 저서로는, 책이 나온 해에 사서 읽은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2001), 그리고 서울에 머물던 2017-18년 겨울에 읽은 "내 마음의 망명지"(2004)와 "시란 무엇인가"(2016)에 이어 네 번째로 읽은 책이다.
다 저자의 인문학 읽기와 문학 사랑을 말해주는 산문집이다 보니, 예를 들어, 이 블로그의 포스트 "서울에서 책 읽기 2"에서도 지금 다시 읽어보는 "음악 없는 삶은 하나의 오류"라고 한 니체와 "번역을 통해서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야말로 시"라고 한 프로스트의 인용, 그리고 아이자이아 벌린과 알렉산더 게르첸(Herzen)에 대한 경의의 언급 등을 이 책에서도 또 만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고 반가웠다. Isaiah Berlin, "The Proper Study of Mankind: An Anthology of Essays"와, 특히, 덴버대 "The Book Stack"에서 우연히 발견한 "The Memoirs of Alexander Herzen Vol. III"를 얻고서 무척 좋아했던 건 유 교수의 책 이후 그들의 책을 찾고 있은 때문이었다.
(벌린의 저 책을 펼쳐보는데, 에세이 "The Pursuit of The Ideal"에서 'Russian radical' 게르첸의 에세이 From the Other Shore를 인용한 구절이 있다. 그중 내가 밑줄 친 부분만 그대로 옮기면:
[A] goal which is infinitely remote is no goal, only ... deception; a goal must be closer -- at the very least the labourer's wage, or pleasure in work performed.)
"작은 것이 아릅답다"의 '책머리에' 글에서 저자는 "시 읽기의 즐거움을 공유하기 위해서 쓰인 이 책이 어느 정도의 공감을 일으킬지는 의문이다"라고 쓰고 있는데, 이 책 독자들이 시를 즐기는 능력이나 시적 감수성에서 저자와, 또는 문학비평가와, 사실 별다르지 않거나 그 안팎일 거란 생각이 든다. ( 좋은 시인처럼은 독자를 믿지 못해서 어떤 비평가는 시인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 책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시편 "사물의 본성"에 대해서(pp. 47-58), 그리고, 오래전 어디선가 한두 편만 읽은 적 있는, 서정주 "질마재 신화"의 시편들을 "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p. 359), "신발"(p. 362) 등 꽤 여러 편 읽을 수 있었다.
유종호 교수의 글에서 자주 또는 종종 만나는 단어 중에, 그게 쓰인 문장이 영문이라면 그냥 자연스레 읽힐 것이, 내게는 좀 생경하거나 우리 글에서 실제 그 뜻으로 많이 쓰이는지 나는 모르겠는 단어들이 있다. 내가 해외에 살면서 우리 책을 아주 드물게나 접하는 탓을 하면서, 그 단어들 사용하기를 배우는 즐거움이 있다. 이 책으로부터는 "'뚜왈랄랄 뚜왈랄랄' 같은 의성음의 발명"의 '발명'과 "'불씨' 같은 어사의 참신성"의 '어사'를 기억한다.
아래에 본문에서 좀 많이 인용한다:
널기와 지붕에
돌을 얹어 놓은 집들
가녀리게 마른가자미 굽는 냄새가 나는
고향의 호젓한 점심때다.
휑하니하얀다 거리를
산 눈 팔이 행상이 혼자서 가고 있다.
--- 다나카 후유지, "고향에서"에서 [책에는 전문 인용] (p. 17)
[토마스 만은] 흥미 있게도 프로이트와 결별한 카를 융을 인용함으로써 프로이트의 통찰을 집약적으로 제시한다. "주어진 조건의 부여자는 우리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데 모든 크고 작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은 의식되는 법이 없다. 꼭 의식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 불가결한데도 말이다." 요컨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사실은 우리가 저지르는 일이라는 것이다. (p. 36)
한국의 노인은
아직도
변소에 갈 때
천천히 자리를 뜨며
"총독부에 갔다 온다"
고 말하는 이가 있단다.
--- 이바라키 노리코, "총독부에 갔다 온다" 에서 [책에는 전문 인용] (p. 128)
어디엔가 아름다운 마을이 없을까
하루 일이 끝나면 한 잔의 흑맥주
괭이 기대 세우고 대바구니 내려놓고
남자도 여자도 큰 머그잔 기울이는
어디엔가 아름다운 읍내가 없을까
먹을 수 있는 열매가 달린 가로수가
끝없이 이어지고 제비꽃빛 초저녁이
청춘의 부으러운 속삭임으로 차고 넘치는
--- 이바라키 노리코, "유월"에서 [책에는 전문 인용]
친근하고 서정적이면서도 예기와 간결함이 깔려 있는 시편이다. 공연한 허세가 없고 소박하면서도 당찬 울림이 있다. (p.39-140)
시의 가치는 감정 고양에 정비례한다. 그러나 모든 고양된 감정은 심리적 필연 때문에 짤막하기 마련이다.
['짤막함의 힘'을 말하며 에드거 앨런 포의 "시의 원리"에서 인용한 부분에서] (p. 147)
나는 아무와도 다투지 않았다, 다툴 만한 상대가 없었기 때문.
나는 자연을 사랑했고, 그다음으론 예술을 사랑했다.
나는 생명의 불길에 두 손을 쪼였다.
그 불이 가물거린다. 나는 떠날 채비가 돼 있다.
--- 월터 새비지 랜더, "나는 아무와도" 전문 (p. 153)
앉아 있는 여인이 있는가 하면
예제로 움직이는 여인도 있다.
혹은 늙고 혹은 젊고.
젊은 여인들은 과시 아름답지만
나이 먹은 여인에겐 댈 수 없구나.
--- 휘트먼, "아름다운 여인들" 전문 (p. 155)
새벽에 일어나 무릎을 꿇고 불씨가
번득이며 반짝일 때까지 입김을 분다
--- 예이츠, "노모의 노래"에서 [책에는 전문(?) 인용] (p. 164)
Apparition of these faces in the crowd:
Petals on a wet, black bough.
--- 에즈라 파운드, "지하철 역에서" (p. 171)
마른 가지에 까마귀 내려앉은 가을 어스름
--- 바쇼 (p. 197)
[그 작곡가는] 레슨이은가 끝난 후 쿤데라를 배웅하더니 문가에 서서 갑자기 쿤데라에게 말하였다.
베토벤에게는 놀랄 만큼 취약한 대목이 많다, 그러나 강력한
대목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취약한 대목이다. (p. 202)
오늘은 왜 이리 기분이그늘과 좋은가
이 햇빛과
바람에 설레이는 푸른 그늘과
나무통만 있복한으면
나는 행복한 디오게네스
--- 수연 박희진, "디오게네스의 노래"에서 (p.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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