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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니클라스 루만, "사회의 사회" 옮긴이 서문에서
    책 읽는 즐거움 2020. 5. 19. 06:30

    장춘익 교수가 번역한 책 중에 이 책이 있는 것을 서울 방문 중이던 2017년 겨울에 어떻게 알게 되어서 곧장 서울시립도서관에서 빌려다 대강 어떤 책인가 여기저기 몇 쪽 읽어도 보면서 살핀 적이 있었다. 결론은, 사회철학도가 아닌 내게는 책 서문을 읽어본 것으로 됐다, 였다. 우선 장춘익 교수의 서문이 본문의 아주 훌륭한 요약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하나, "set of sets"나 "고유값" 개념이 적용된 듯한 점이 기억에 남는다. 아래는, 그때 책 서문을 (대부분으로 기억하는데) 발췌해 놓은 거다. 1,300 쪽이 넘는 이 책 내용이 궁금할 분들에게, 내게나 마찬가지로, 다소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 덧붙임: 정성훈 교수의 서평 )

     

     

    "루만이 사회학자로서 전 생애에 걸쳐 추구한 것은 사회이론, 그것도 근(현)대사회에 관한 이론이다. 1997년에 출간된 이 책은 그러한 작업의 결정체이다. 핵심적인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 근대사회는 돌이킬 수 없게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루만이 보기에 사회는 하나의 관찰자가 하나의 객체처럼 앞에 놓고 외부로부터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사회는 '사회적'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포괄적인 단위로, 사회에 관한 모든 커뮤니케이션도 그 안에 포함된다. 그러니까 사회학과 사회이론도 예외일 수 없다. 이 점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사회이론은 자신의 대상을 규정하는 문제에서부터 만만치 않은 벽에 부딪친다. 대상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 자신을 대상 속에 집어넣어 읽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회에 대한 기술記述이 사회 구조의 영향을 받고 역으로 사회에 대한 기술이 다시금 사회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런 사회를 어떻게 기술할 수 있을까? 사회의 사회는 사회의 구조와 사회에 대한 기술 사이의 이런 복잡한 관계를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다. 오늘날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통섭적 학문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할 루만의 작업은 바로 이렇게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대상에 적합한 이론적 수단들과 표현들 찾아내기 위한 것이다.

     

    "사회라는 특별한 대상을 포착하기 위해 루만이 선택하는 핵심적인 개념은 '자기지시적'이며 '자기생산적'인 체계이다. 사이버네틱스와 생물학에서 차용한 이 개념은 어떤 복잡한 구성체의 요소들이 서로 재귀적으로 관련을 맺으면서 생산되는 것을 가리킨다. 루만은 이러한 체계 개념에다 논리학, 언어학, 의미이론, 커뮤니케이션이론, 매체이론 등을 결합해서, 의미를 사용하는 커뮤니케이션들로 이루어지는 자기지시적 체게인 '사회적 체계'란 개념을 형성한다. 특정한 종류의 커뮤니케이션들 사이에 혹은 특정한 전제를 바탕으로 하는 커뮤니케이션들 사이에서 그렇게 '자기지시적인' 연쇄가 이루어짐으로써 특정한 사회적 체계들이 형성되는데, 가령 참석자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들의 연쇄로는 '상호작용체계'들이, 구성원 자격을 조건으로 하는 커뮤니케이션들의 연쇄로는 '조직체계'들이, 특정 기능과 연관된 커뮤니케이션들의 연쇄로는 '기능체계'들이 성립한다. '사회'는 이런 특정한 사회적 체계들 모두를 포괄하는 사회적 체계이다. 사회를 이렇게 커뮤니케이션체계로 정의함으로써 루만은 사회의 요소를 인간들로 보는 모든 휴머니즘적 사회 이해와, 또 사회를 지역적 경계에 따라 나누는 모든 지역주의적 사회 이해와 결별한다. 이렇게 사회를 포괄적인 커뮤니케이션체게로 규정하는 것이 제1장의 내용이다.

     

    "사회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려면 이제 커뮤니케이션들의 연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분석해야 할 것이다. 제2장에서 바로 이런 분석이 이루어진다. 루만에게 커뮤니케이션은 정보, 전달, 이해로 구성되는 사건이다.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이 일단 이해로 종결되면, 커뮤니케이션의 수신지는 발신지의 기대에 호응하는 식으로 반응할 수도 있지만 기대에 반하거나 기대를 벗어나는 커뮤니케이션으로 반응할 수도 있고 아예 커뮤니케이션을 중단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확률적으로만 보자면 기대되는 후속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날 가능성은 낮은데, 하지만 그렇다면 발신자는 커뮤니케이션을 할 용기를 갖지 않게 될 것이고 커뮤니케이션의 연쇄라는 것은 아예 성립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기대하는 후속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는 것이 비개연적인데도 어떻게 충분히 자주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즉 비개연적인 것의 개연성이 어떻게 성립하는지가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루만의 핵심적인 물음이다. 하나의 복잡한 사회는커뮤니케이션이 충분히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고, 수신지들로부터 -- 언제나는 아니지만 -- 후속 커뮤니케이션이 규칙적으로 기대될 수 있을 경우에 성립한다. 이를 위해서는 특별한 장치들이 발달해야 한다. 가령 문자와 인쇄는 시공간적으로 수신지 범위를 극적으로 확대하고, 화페와 같은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매체는 타인에게 재화를 넘겨주는 것과 같은 지극히 비개연적인 일도 아주 정상적으로 일어나게 한다. 루만에게는 권력, 진리, 사랑, 가치도 각각 비개연적인 커뮤니케이션들의 연쇄를 개연적으로 만드는 매체들이다.

     

    "그러면 사회는 어떻게 변화해 가는가? 사회는 오직 커뮤니케이션의 연쇄 속에서 구조들이 형성되고 그 구조들이 변형되어 나가면서 변화한다. 점점 더 많은 전제와 결부되고 그리하여 점점 더 비개연적인 구조들이 생겨나고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과정인 것이다. 그 메커니즘은 이렇다. 어떤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후속 커뮤니케이션은 기대에 부응할 수도 있고 부응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전자의 경우에는 기대(=구조)의 응축이 일어나고 후자의 경우에는'변이'가 발생한다. 변이는 적절치 못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됨으로써 부정적으로 '선택'되거나 아니면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서 긍적적으로 선택된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선택된 변이를 체계의 자기생산과 양립할 수 있게 조정하면, 이제 새로운 구조가 '안정화'된다. 변이, 선택, 안정화는 커뮤니케이션 안에서 일어나지만 모두 우연성을 배제할 수 없고, 그런 점에서 새로운 구조의 발생은 '창발'이며 '진화'이다. 이로써 루만은 이성이든 특정한 가치든 상호이해든, 사회의 본질적 목표를 상정하는 모든 목적론적인 쇼ㅣ회 이해와 결별한다. 진화가 사회체계의 최적의 적용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간다는 것도 루만의 사회진화 이론과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사회의 진화로 '복잡성'을 처리하는 능력과 방식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복잡성을 처리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장치들이 '진화적 성취'들이다. 그래서 진화는 필연적 과정도 아니고 반드시 바람직한 방향으로 간다고 할 수도 없지만, 그러나 진화적 성취들을 포기할 경우 사회의 당면한 복잡성을 처리할 수 없어 심각한 부작용에 시달릴 수 있다. 가령 화페를 포기할 경우 복잡한 거래들을 처리할 수 없어 생기는 혼란을 생각해보면 된다. 이러한 진화의 문제가 제3장의 주제이다.

     

    "사회가 진화를 통해 변해간다고 할 때, 사회를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 근대사회는 어떤 유형인가? 제4장에서 루만은 이 물음을 파고든다. 루만은 사회가 일차적으로 어떤 부분체계들로 분화되었는가에서 사회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는 분절적 분화, 중심/주변 분화, 계층적 분화, 기능적 분화라는 네 가지 '분화형식'을 제안한다.  루만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계층적 분화로부터 기능적 분화로의 이행 과정이다. 기능적 분화가 성립하면 각 기능체계는 오직 하나의 기능만을, 하지만 그 기능에 대해서는 보편적인 관할권을 갖는다. 기능들 사이에 서열도 없고 기능체계들을 조절하는 중심도 정점도 없다. 바람직한 균형을 말할 수도 없다. 기능체계들은 사회 내부의 환경(=다른 사회적 체계들)과 사회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오는 신호들에 의해 교란되고 그 교란에 자신의 관점에 따라 반응할 따름이다. 각 기능체계는 기능 외에 다른 준거점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닫힌 체계이지만, 사회 내의 다른 체계들과 구조적으로 결합되어 있고 외부로부터 오는 신호에 의해 교란된다는 점에서 또한 열려 있는 체계이기도 하다. 또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는 개인들이 취급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이제는 개인들이 가령 계층화된 사회에서처럼 전체 인격으로서 하나의 부분체게에 '포함'되는 일은 성립하지 않는다. 개인들은 모든 기능체계에 접근할 수 있지만 어느 기능체계에도 완전히 포함되지 않는다. 이렇게 자기 사회분화형식의 변화를 추적하여 루만은 근대사회를 근대사회된 사회로 규정한다.

     

    "커뮤니케이션체계인 사회의 자기생산은 자신에 대한 '관찰'과 함께 수행되는데, 이때 사회의 구조는 자기관찰에 영향을 미치고 자기관찰은  또한 사회의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사회의 자기관찰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응축되고 확인되는 과정을 거쳐 후속 관찰들을 이끄는 중요한 틀로 고정되는데, 루만은 그런 자기관찰들을 '의미론'이라고 한다. 가령 존재론, 전체와 부분, 정치와 윤리 등으로 집약되는 구유럽의 의미론들은 계층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 나온 의미론들로 파악된다. 이에 반해 주관, 개인, 보편적 도덕으로 표현되는  의미론들은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 나온 의미론들인데, 다만 기능적 분화로 인해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과도기적 의미론들이다. 한편 기능체계들의 자기관찰로 이루어지는 '반성이론'들이 점차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는데, 다만 특정한 기능의 관점에 한정되어 있어 사회이론의 지위를 가질 수는 없다. '위험', '정보'에 초점을 맞추눈 의미론들('정보사호', '위험사회')은 특정한 기능체계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장점을 갖지만, 이러한 의미론들 역시 자신이 하나의 구별에 바탕하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반성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사회 이론은 자신의 대상 속에 자신이 포함된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특별한 구별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고려하고 이론 자체에 반영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유럽에서 중요했던 의미론들을 사회의 구조변화와 연결해 해명하는 작업이 제5장의 내용이다.

     

    "사회의 모든 자기관찰이 특정한 구별에 기초하고 있고 스스로는 자신의 구별을 관찰할 수 없다고(관찰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구별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관찰이 각자의 맹점을 갖고 있다고 해보자. 이것이 이런 주장을 하는 이론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면, 사회이론은 결국 상대주의로 갈 수밖에 없는가? 루만은 사회의 관찰이 이차 관찰로 전환되어도, 즉 각 관찰이 다른 관찰들을  관찰하면서 성립하고 각 관찰이 사용하는 구별이 다른 관찰에 노출되어 다르게 관찰 된다고 하더라도, 관찰들을 끌어들이고 관찰들의 출발점이 되는 어떤 안정적인 점이 형성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피력한다. 그것이 바로 근대사회의 '고유값'이 될 것인데, 루만은 그것을 '기능'으로 본다. 기능이 기능체계들의 관점으로 취소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데다가, 기능에 대한 관찰도 다시금 기능을 관점으로 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루만에게 기능의 기능은 기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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