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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메모해 놓은 글이 생각나서 PC 파일을 보니 거기 있다.
좀 우스꽝스런 글이지만 나중에 생각나게끔 그때 일을 간략히
즉흥적으로 적은, 그야말로, 메모였는데, 지금 읽어 보니 그때 일이
잘 적혀 있다. 그러니 괜찮게 쓴 메모인 것도 같다. 평소 일기를 쓴
적이 없다 보니 이런 메모가 마치, 사라지고 없는 일기장의 한
페이지라도 되는 듯 싶어서, 이참에 여기 이 블로그에 옮겨 놓는다.
어느 금요일 밤의 메모
맑고 고운 시인의 노래는
금요일의 향기
<스칼렛> 밤은 깊어
물먹은 놋쇠 항아리
스르르 가라앉는가 (*)
금빛만 가득 찰랑이는가
<그리운 금강산>
여운이 청아하네
2000년 가을.
(*) 김춘수 시인이 자작시 낭송에서 읊은 ‘葉篇二題’ 중
“놋쇠 항아리 하나 / 물먹고 가라앉았다” 에서.
메모의 내용은 아렇다. 2000년 가을 어느날 서울에서 있은,
시인들의 시낭송 모임에 지인의 초대로 참석했다. 시인이
아닌 참석자가 나 말고는 거의 없었을 거다. 그날 인사를
나눈 여러 시인 중에 특별히 한 여성 시인을 기억한다.
위 메모에서 '금요일의 향기'가 바로 그 시인의 이름을 기억
하기 위한 구절이다. 마치 그래야만 안 잊을 거라는 듯.
몇 시인들만의 2차에 나도 끼고 결국 카페 <스칼렛>에서의
3차에도 함께 하게 됐다. 프로 성악가 급인 그 여성 시인이
<그리운 금강산>을 불렀다. 얼마나 멋지던지! (그 시인은
사실 여러 면에서 참 멋지고 또 고운 분이다.) 금빛 찰랑이는
생맥주 잔도 마구 부딪고 마구 비웠다. 술먹은 놋쇠 항아리가
됐던가. '물먹은 놋쇠 항아리'는 그날 김춘수 시인이 자작시를
낭송했다는 걸 적어 놓고 싶어서였다.
행복했던 시간을 추억하는 것 또한 행복이다.
일기는 아니라도 메모는 남기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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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2012.01.17 17:00
어쩌면...
암호 같은데도, 그날의 이야기를 시 적으로 그렇게 잘 적어놓으셨는지,
그 자체로 하나의 시 같아요.
그 단어들에는 추억이 방울방울 그대로 남아있고.
일기가 아니더라도 세월이 지난후에
이렇게 보면서 그날일을 되돌릴수 있는거 좋아요.
블로그도 아마 그래서 있는것이 아닌지...
그날의 특별한 경험도 낭만스러운 하루 입니다.-
노루 2012.01.18 01:54
춘천에서는 내가 평소처럼 혼자 가서 맥주 마시고 있는, 분위기
좋은 곳으로 알려진, 카페로 저녁 무렵 춘천의 시 동인회가 시낭송회
하러 오는 바람에 함께 어울리게 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좀 색다르고
소탈하고 진지한 그 분위기가 늘 좋더군요. 그렇게 해서 저녁 식사에
까지 끌려간(?) 행복한 적도 있었지요.
그날 내가 시작하고 나중엔 그 시인의 리드를 따라서 함께 불렀던 게
<My Way>였던 것 같은데 그러면 그때도 내가 그 노래를 알았었나,
하여튼 그날 생각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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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허준 2012.01.18 23:01
저는 어학이 좀 부족한데
시는 더욱 어렵네요-
노루 2012.01.19 00:25
시, 하시니 생각나는데, 그날 그 김춘수 시인의 ‘葉篇二題’ 시가
적혀있는 종이를 어디 책 갈피에 끼워 뒀을 텐데 아마 이사오면서
다 없어졌을 것 같네요, 지금 읽어보고 싶은데.
놋쇠 항아리 하나
물먹고 가라앉았다
초현실적은 아니지만, 달리의 그림 보는 것 못지않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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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ie 2012.01.19 01:30
노루님께도...시인의 본성이
마음 속 깊이 가라앉아 있나 봅니다.
멋진 메모네요.
금요일의 향기를 쓴 시인은 누구신지요?
시를 쓰는 분들의 독특한 언어능력에 저는 늘 감탄하지요.-
노루 2012.01.19 02:03
'금요일의 향기'를 쓰신 건 아니고요, 국문학과 함께 피아노를
전공하시고 시집으로는 <하루씩 늦어지는 달력>, <세계를 떠난
사람의 집> 등이 있는, 김향 시인입니다. 여행 에세이로 <길은
산으로 휜다 아니다 다시 바다로 열린다> 말고도 최근에 또 하나
나온 거로 알고 있지요.
<길은 산으로 ...>에 의하면 경남 남해의 한 '예사로워 보이지
않던 바위' 를 보고 나서 쓴 것으로 보이는, 김향 시인의 내가
좋아하는 시 중에 하나인 <제4빙하기, 툰드라>를 소개하지요.
jamie 님 덕분에 이 시를 또 읽어볼 수 있어서 좋으네요.
제4빙하기, 툰드라 / 김향
쉿!
동굴 안에 두 사람이 포개고 있어
나이든 여자와 젊은 남자야
그들은 말이 없어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도 없어
머리맡에는 부싯돌이 정전 중이네
먹다 버린 조개껍질들이 달그락거리고
팔랑, 꽃잎 하나 고요 속으로 날아드네
절정의 날들도 빛나는 상찬도
온갖 미혹의 소용돌이도 벗어버리고
그들은 뼈와 뼈로 누워있네
동굴 밖에는 순록과 영양들이 뛰놀고
매머드가 지평선을 끌며 지구 밖으로 가고 있어
얼어붙은 땅에서 따스한 재가 피어오르네
허공이 몸을 풀며 아른아른 떨리네 -
jamie 2012.01.21 01:29
'금요일의 향기'도 시 제목으로 좋을 것 같잖아요?
올려주신 김 향 시인의 시가 아주 좋네요.
가만히 느끼려 애쓰면...저 먼 과거와 제가 연결된 삶이란게
절실히 느껴질 때가 있어요. -
노루 2012.01.21 06:16
단어의 힘이란 게 묘해요. 읽는 사람에게 단서가 되어서
이겠지만요. '금요일의 향기' 만 해도 사실 부자연스럽게
갖다 붙인 두 단어인데 ....
기억이 '나'라고 딱 그렇게 말한 걸 Hume 이 20대에 쓴
책에서 처음 읽었지만, 단순한 기억 이상의, 어떤 연상도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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