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에서 책읽기 7: 제1회 미당문학상 수상 작품집에서시 2018. 2. 27. 18:18
제1회 미당문학상 수상 작품집(2001)에는 수상작 정현종의 시
"견딜 수 없네"를 포함해서, 본선에 오른 시인 10인의 각각 여섯 편
정도의 시가 실려 있다.
여전히 여기저기서 내게는 이상하기만 한, (나도 한국 사람이지만)
특이하게 한국적인 것으로 보여서 '한국식'이란 말이 절로 나오는,
일들을 만나곤 하는데, 이 책 서두의 "제1회 미당문학상 수상작
발표"를 읽다가 또 "어?" 하게 되었다.
한 해에 (이 경우는 2000년에) 창작, 발표된 시에서 가장 좋은 시를
뽑기 위한 심사기준은 나 같은 시의 독자도 한 번 읽어두면 좋은
거였다.
심사 기준은 크게 두 가지 ... 첫째, 시의 멋과 맛, 명민한
감정이 잘 드러나야 하는 점 ... 둘째, 시는 서사와 달라
메시지가 요구되지 않는 반면, 상상력과 이미지 사이의
역동적인 힘을 보여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그 다음:
[본심에 오른] 황동규 시인의 경우 그의 부친의 이름을
딴 황순원문학상이 미당문학상과 함께 시행되는 관계로
첫회에는 아예 본심에서 다루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합의
아래 시인의 작품들을 심사에서 제외하였다.
정현종 시인의 수상작과 나희덕 시인의 시 두 편을 (온라인에 링크
시키느니 어차피 그게그거라 싶어서) 전문을 여기 옮긴다.
정진규 시인의 "적멸의 본가 -- 시인 이성선" 부분도 덧붙인다.
견딜 수 없네 / 정현종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기러기떼 / 나희덕
羊이 큰 것을 美라 하지만
저는 새가 너무나 많은 것을 슬픔이라 부르겠습니다철원 들판을 건너는 기러기떼는
끝도 없이 밀려오는 잔물결 같고
그 물결 거슬러 떠가는 나룻배들 같습니다
바위 끝에 하염없이 앉아 있으면
삐걱삐걱, 낡은 노를 젓는 날개 소리 들립니다.
어찌 들어보면 퍼걱퍼걱, 무언가
헛것을 퍼내는 삽질 소리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퍼내도
내 몸 속의 찬 강물 줄어들지 않습니다
흘려보내도 흘려보내도 다시 밀려오는
저 아스라한 새들은
작은 밥상에 놓인 너무 많은 젓가락들 같고
삐걱삐걱 노 젓는 날개 소리는
한 접시 위에서 젓가락들이 맞부비는 소리 같습니다
그 서러운 젓가락들이
한쪽 모서리가 부서진 밥상을 끌고
오늘 저녁 어느 하늘을 지나고 있는지
새가 너무 많은 것을 슬픔이라 부르고 나니
새들은 자꾸 날아와 저문 하늘을 가득 채워버렸습니다
이제 노 젓는 소리 들리지 않습니다
도끼를 위한 달 / 나희덕
이제야 7월의 중반을 넘겼을 뿐인데
마음에는 11월이 닥치고 있다
삶의 기복이 늘 달력의 날짜에 맞춰 오는 건 아니라고
이 폭염 속에 도사린 추위가 말하고 있다
11월은 도끼를 위한 달이라고 했던 한 자연보존론자의 말처럼
낙엽이 지고 난 뒤에야 어떤 나무를 베야 할지 알게 되고
도끼날을 갈 때 날이 얼어붙지 않을 정도로 따뜻하면서
나무를 베어도 될 만큼 추운 때가 11월이라 한다
호미를 손에 쥔 열 달의 시간보다
도끼를 손에 쥔 짧은 순간의 선택이,
적절한 추위가,
붓이 아닌 도끼로 씌어진 생활이 필요한 때라 한다
무엇을 베어낼 것인가,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안의 잡목숲을 들여다본다
부실한 잡목과도 같은 생(生)에 도끼의 달이 가까워졌으니
7월의 한복판에서 맞이하는 11월,
쓰러지지 않기 위해 도끼자루를 다잡아보는 여름날들
정진규, "적멸의 본가 -- 시인 이성선" (부분)
그의 몸을 불살라 백담계곡 첫 담에 뿌리자 이끼, 바람,
풀잎, 햇살, 나뭇잎 물방울들이 손을 벌려 그를 받아갔다.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W. S. Merwin 의 시 두 편 (0) 2018.05.18 Alice Walker 의 시에서처럼 (0) 2018.05.04 정지용의 "말"과 조병화의 "나귀의 눈물" (0) 2018.01.28 위선환 시인의 "탐진강 연작시"에서 (0) 2018.01.09 황동규 시집, 최승자 시집을 읽고서 (0) 2017.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