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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가을날 오후, 아름다워지려는 한 세상
    2011. 9. 20. 01:42

      

     

    '한 세상이 아름다워지려는구나.'

    '어느 가을날 오후' '과일가게에서' 최영미 시인이 그랬다.

     

    교회당에서 들려오는 찬송가 소리 들으면서나 어느 산사의 관세음상 앞에서,

    또는 어느 공원 벤취서나  아늑한 카페 창가에서 그랬으면, 아마 난 못 들은

    척 했을 거다.

     

    슬프고도 따뜻한, 우리 삶의 평범한 진실이 또한 아름답기도 한 것을, 나는

    유화든 수채화든 과일가게 그림을 볼 적마다 느끼는 것도 같다.



                

                           과일가게에서

                                               

                                               최영미

     

     

           사과는 복숭아를 모르고

           복숭아는 포도를 모르고

           포도는 시어 토라진 밀감을 모르고

     

           이렇게 너희는 서로 다른 곳에서 왔지만

           어느 가을날 오후,

           부부처럼 만만하게 등을 댄 채

           밀고 당기며

           붉으락푸르락

           한 세상이 아름다워지려는구나

     

     

     

    한 번 읽고 마음에 든 시다.

    술술, 군더더기도 모자람도 없이, 절묘한 짜임새로, 참 '만만하게'도

    세상과 삶에 대해 말해준다. 철학자의 글이 이만 같아라.

    제목을 포함해서 한 줄 한 줄이 다 아름답고 시 같다.

     

    이 시를 처음 읽고서 몇 년 후, 최영미 시인이 자작시 중에서 특별히 가려

    뽑은 몇 편의 시에 이 시가 들어 있는 걸 보고, 그렇지! 하고 좋아했었다.

     

    서로 다른 곳에서 와서 서로 모르지만 '붉으락푸르락' '밀고 당기면서'도

    '만만하게 등을 댄 채'인 과일들을, 시인은 고운 눈으로 따뜻하게, 귀엽게

    본 거 같다.

     

    언젠가 어느 카페 게시판에 쓴 (이 블로그에도 옯겨 놓은) 내 짧은 글

    '진화론'이 냉정한 마음을 보이는 것 같아 부끄러워지려고 한다.

    단 네 줄 짜리 진화론이니 여기 다시 적어본다.

     

     

     

                               진화론

     

     

           언젠가 개와 닭은
           확실히 갈라졌다.
           소나무와 참나무도.

           사람은 속으로 갈라졌다.

     

     

     

    나나 너나 가끔 '시어 토라진 밀감'일 수야 있지만, 사람 같아 보이지 않는

    사람은 거리를 두는 게 좋다는 생각이다. 돌멩이와 등을 댄 채인 복숭아는

    으깨어지기 마련이니.


     

     

                 *                     *                    *

     

     

     

    우린 서로 다른 곳에서 왔지만, 청명한 가을날 오후 여기 워싱톤공원에서

    함께 테니스 치고 있다. 깎아치기(slice)를 잘하는, 농담 잘하고 착한

    스티브, 몸이 무겁고 느리지만 힘 있게 치는 데이브, 중국계로 보이고 한때

    선수였던 듯한, 작은 키의 이쁘장한 바비. 게임이 재미 있다.

    그저께 오후의 일이다.

     

    오늘 늦은 오후엔, 우리 집에서 차로 딱 6분 걸리는 또 다른 공원에서 여기

    거주하는 한국인 세 분과 테니스 친다. 그 중 두 분은 한 달 전쯤 그 공원에서

    바로 옆 코트에서 치고 있다가 알게 됐다. 그 분들의 일요 테니스에 끼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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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나 2011.09.20 23:30 

    노루님이 매혹된 시어의 마음에 고개를 끄덕이고,
    노루님의 짧지만 확실한 철학이 들어간 시어에 또 마음을 기대게 되네요.
    맞아요, 맞장구를 치면서...맨날 돌멩이에 기대고 깨지는 복숭아 같은 저는요~

    최영미 시인의 시를 오랜만에 봅니다.
    한때 그리도 한때 우리들 사이에 회자되었던...오래묵은 그 시인의
    시집을 뒤적여봐야 할까봐요.

    저녁이 내려앉은 테니스 코트가 노루님의 즐거운 샘터네요...

     

    • 노루 2011.09.22 00:16

      여기 워싱톤 공원의 테니스 코트는 누구나 아무 때나 가서 그렇게 온 사람들 끼리
      적당히 짝을 맞춰 치는 덴데, 정말 피부색도 체격도 나이도 갖가지인 사람들이
      웃고 떠들기도 하며 어울려 즐기는 걸 보면, 참 좋은 세상이구나, 하게 되요.

      그런데 한번, 단식 게임을 하다가 세트 중간에 미국 정치 얘기를 하게 됐는데,
      역시 사람마다 생각은 아주 다를 수 있구나, 하는 걸 새삼 느꼈지요.

      그러니, 싱글(미혼은, '아직' 결혼 안 했다는 뜻이 있으니)로 사는 이유 중에,
      혹시라도 공화당 지지자가 될 자녀가 태어날까 봐, 를 꼽을 만하지요.

      최영미 시인이 첫 시집의 어떤 시에 대한 어떤 문인(들)의 오해 때문에 몹씨 속상해
      하는 걸 어느 글에서 읽고 당장 시집을 사서 읽어본 생각이 나네요. 오해할 거나
      비난(시 비평이 아니라)할 건 전혀 없던데. 더구나 문인이 ....,

      떠오르는 대로 쓰다 보니 자꾸 옆으로 빠지네요. ㅎ ㅎ

     

    Helen of Troy 2011.09.21 03:07

    여름 한철 등한시했던
    책과
    그리고 시와 함께 하면
    좋을 가을이
    무척 고맙게 느껴져요.

    올려 주신 최영미님의 시....
    저도 오랜만에 새롭게 잘 읽었습니다.

    저는 테니스는 못 치니
    늘 하던대로 높은 가을하늘을 친구삼아
    요즘 무척 재미들인 자전거를 타고 나갑니다.

    노루 2011.09.22 00:44

    할 일 없을 땐 언제나 책이 기다려주고 있다, 는 건
    참 좋은 거 같아요. 그래도, 공부해야 하는 게 아니라면,
    사람들 하고 즐거운 시간 갖고, 특히 이렇게 좋은 계절
    밖에 나가서 운동하고 놀고, 그런 일로도 시간이 빠듯한
    게 더 좋아요.

    올 여름, 이태리에 독일에, 로키에, 한국에, 그리고
    이제 돌아와서 자전거 타고 동네 벌판으로 나가시는
    헬레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보기 좋아요.

     

     

    eunbee 2011.09.26 21:15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최영미 시인인가요?
    그녀의 시가 참으로 곱네요.

    돌맹이와 복숭아랑 등대고 앉으면 상채기나는 것은 복숭아죠?
    그러나 돌맹이에게도 복숭아의 상처가 온통 범벅이 되어있을테니,
    서로 불행한 것이네요.

    인연은, 도반은, 인생길에 매우 중요하지요.

    교수님의 시 '진화론'은 명시입니다.
    제게는 교훈입니다.

    • 노루 2011.09.26 23:52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에 실려 있는 시입니다.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 를 두고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 시집이
      나오고 최영미 시인이 일부 문인들로 부터 부당하게 고통을 받은
      것 같더군요.

      인연, 그렇지요.
      우리네 삶에선, 서로 인연이 닿은, 우리끼리가 서로 주연이고 조연
      아닌가요, 나머지는 다 엑스트라인데. ㅎ ㅎ
      사람과 사람 사이가 아닌 인연이 깊은 영향을 끼치기도 하지만요.

      가을 기분이 이젠 납니다.
      쓸쓸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축제 전야나, 어렸을 적, 운동회 날 이른
      아침 기분 같아요. 이제 도시의 동네마다 멕시칸 숄을 두른듯
      알록달록해지겠지요. 그리고는 멋진 겨울이 ....

      eunbee 님은 파리와 쏘 공원 생각이 많이 나시나 봐요.

    • eunbee 2011.09.27 07:14 

      네~
      제 마음은 늘 파리와 쏘공원을 어정거리고 있어요.

      [도시의 동네들은 멕시칸 숄을 두른듯 알록달록해 진다]라는 표현은 멋진 시 한줄이에요.
      교수님은 진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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