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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추석 연휴에 춘천에 있으면서 쓴 짧은 글이 생각나서 읽어 본다.
길에서
추석 닷새 연휴 첫날
토요일 아침 연구실.
산은 쓸쓸해서 이제는
혼자선 안 가지만
이 아침
북한산이 아득히 다가선다.
헬렌이 보고 싶다. 몇 년 전
길 가다 만나
잠깐 몇 마디 주고 받은 적 있는.
틈틈이 읽던 책 한 권 들고
명동 길로 나선다.
그저 몇몇인 것을.
낙서하듯 이 글을 내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리고 명동으로 걸어 내려가던 생각이 난다.
그날 아침의 그 느낌이 되살아 난다. 그냥 기억 속에서만 회상 하는 것과는 역시 다르다.
기록해 둔다기 보다는 표시해 놓은, 이런 글의 묘미를 알 것 같다. 느낌 대신 적어 놓은
느낌의 힌트나 제목이 오히려 더, 그때를 다시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누가 또 생각난다. 저 때의 '몇몇'에는 없었던, 그 후 5년쯤에 새로 알게 되고 '조금' 친해진
그 사람은 지금의 내 '몇몇'에 들까. 말하자면, 최근에 읽은 좋은 소설이나 작가의 인상이
더 선명한, 그런 건가.
"위에 떠 있는 것들은 가벼운 것들"이라고, 생각나는 빈도가 비중에 비례 하지 않는데 대해
변명처럼, 엊그젠가, 쓰기도 했지만, 가벼운 것이라고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역시 아니란
생각이다. 아무래도 난, "기절한 울새 한 마리 다시 제 둥지에 데려다 주기만 해도 나는 헛
산 게 아닐 거다"의 에밀리 디킨슨 쪽인 것 같다.
고향처럼 그리워하는, 그런 풍경 또한 몇몇 떠오른다.
그저 몇몇인 것이, 실은, 비밀로 하고 싶을 정도로, 참으로 만족스럽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이다.
일상이 더없이 단순하다 보니 예전의 낙서에다 또 낙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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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편지2014.01.12 09:39
노루님의 몇 편의 시를 감상해 본 바로는 '단가'의 느낌,
혹은 세속을 떠난 옛 선비의 여유로운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 '몇몇'에 대해 아주 깊이 공감합니다. 사실은 몇몇이 아니라면, 생활이 생활 같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제가 사는 곳도 밤낮없이 조용한 산기슭인데 시내에서 이 아파트로 돌아오면 드디어 제정신인 것 같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자꾸 깊이 들어가시는 노루님을 느낍니다.-
노루2014.01.14 00:45
'밤낮없이 조용한 산기슭'이라, 가장 좋은 데에 사시네요.
제 홈페이지의'자유게시판'에 올렸던 저 글은, 쓰게 된 것도 그랬지만 10년 지나서 읽어볼 수 있는
것도 제 경우엔 다 컴퓨터 덕이지요. 그런데 저 글을 저는 그냥 '짧은 글'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시라고 하기에는 실은 '생략형 산문'을 시처럼 줄 갈라 쓴 글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ㅎ
전에 (벌써 10년이 넘었네요),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갓 등단한 20대 초반의 여성 시인과 온라인 게시판에서
주고 받은 대화가 생각나네요. 산문시를 독자로선 그냥 산문이라고 해도, 그렇게 읽어도 된다고 했더니, 그
시인은 그건 안 된다고, 산문시를 산문이라 할 수는 없다고, 그래서 저는 또, 그건 시적인 산문의 영역을 너무
좁히는 게 아니냐고, ....
시와 산문에 대해서 이런저런 각도로 생각해볼 수 있는 재미있는 대화였는데, 제가 그 시인의 스승의 친구인
게 우연히 드러나자 그만 끝나고 말았지요. "내게는 시인에게서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서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는 좋은 기회"라고 댓글을 썼지만, 아쉽게도, 그 시인은 '스승의 친구'되는 사람의 생각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접지 못하는 것 같더라고요. 저한테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 참 아쉽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이해는 되는 것이, 제자가 스승인 자기의 시에 대한 시 감상 글을 그 대학의 신문에 실었다고
"제자가 건방지게 ..."라고, 어떤 시인이 제게 말하는 걸 듣고 놀란 적이 있었거든요. -
파란편지2014.01.14 08:52
아무리 유명한 작가이고 그에 관한 작가론이 있다 해도 독자들은 독특한 관점으로 읽기 마련이고 작품은 그래서 그 값어치가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창작의 의미조차 줄어들 것 같기도 하고......
저 같아도 그 '대화'의 중단에 아쉬움, 안타까움을 느꼈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새로 탄생한 시인과의 대화였는데...... -
노루2014.01.14 10:42
그렇지요. 저마다 '독특한 관점'에서 누구를 좋아하듯, 독자가 글에서 느끼는
매력도 그럴 것 같아요.
그 시인과는 그 이전부터도 알고 몇이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도 한두 번 함께
했었지요. 그래서 더 어려워하는 것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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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nbee2014.01.12 19:40
홈페이지나 블로그에나 무언가를 기록해 둘 수 있는 공간이라서 소중해요.
예전에 쓴 내 글을 뒷날 다시 꺼내 읽어보면, 그때 그날이 떠오를 뿐만아니라,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맙고 반가운지요.
교수님께서는 춘천 명동거리에서의 추억도 많으신듯해요.
저도 그 거리 분위기 조금은 알아요.
후평동에 사는 제 남동생네집에도 가야하는데, 올겨울엔 이러고 있네요.
그저 몇몇인(매우 소중한, 그것으로 잔이 넘치는) 그 보배로운 기억의 자리, 기억속 인연,
교수님의 숨겨두고픈 보물들을 엿보게 되어 제 마음도 낭만스러움에 살짝 흔들려요.
교수님이 흔들림 숨기는 그 추억들, 저는 왜 아련한 설렘이 이는지요.ㅎㅎㅎ노루2014.01.14 03:14명동보다도 그리로 걸어내려 가던 길에 생각나는 것들이 많아요.
<바라>라는, 특별한 고성능 고급 스피커 세트가 있던, 고전음악 찻집도
그 길가에 있었고요. 늦봄이나 초여름 집 담장 너머의 보라빛 라일락꽃이나
담장에 느러진 줄장미꽃들도 생각나고요.
위에 '조금' 친해진 사람이라고 썼지만, 일 년에 한두 번 만나기도 어려운,
오래된 친구와 달리, 그냥 일상에서 자주 보게 되고 그러면서 늘 호의로
대해주는 사람들이 어쨌든 '현재의 주위 사람들'이니까요. -
sellad (세래드)2014.01.14 17:19
"단순한 일상" ........,그도 축복 입니다. (단순하지 않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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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2014.01.14 23:18
사실은 지금의 단순하고 평온한 일상이 될수록 오래 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내면상으로 단순하지 않게 만들어 볼 시도를 할 수 있는 건 정말 축복이고요.
일상은 단순한데 평온함이 깨지는 일이 없기를 또 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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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람2014.01.16 08:09
글이 부족한 전 늘 사진만으로 남겨 두는 낙으로 살죠^^
단순함을 이리 글로 남기시는 건 멋진 인생이라 봅니다 ㅎㅎㅎ-
노루2014.01.16 22:56원래 나돌아 다니기를 좋아하는데 사정이 있어서 그러지를 못하고
나들이라곤 그저 두세 시간 테니스나 치고 오는 거다 보니
낙서처럼 몇 줄 쓸 거리조차 안 생기네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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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2014.01.22 16:43
저그림이 참 말갛고 좋으네요
창가에 햇살이 쏟아지고
..노루2014.01.22 23:50저도 저 그림이 '말갛고' 밝아서 좋으네요.
나무 탁자인지 장(hutch)인지의 질감도 따뜻한
친근감을 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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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2014.01.24 22:58
어느 저명하신분이
"예술이란 눈속임이다"란말씀이 생각납니다
어느때는
저도 내마음에서 울어나와서 그리는그림이아니라
어케하면 좀 잘보일려하고 예삐보일려하는 붓터치가는곳마다 그리하니
절로 질릴때가있어요 ㅋ
그런거생각하면 젊은날 그린그림이 좋은것같기도.
우중충 추상화도아니고 먼생각으로 그렸는지..
그림도 세월가니 타인의눈에 비춰질그런그림으로 바뀌는가
편안한그림으로 바뀌는가 통 그러데요 .. -
노루2014.01.25 11:45
여기저기서 온갖 사진들을 많이 보게 되다 보니
새삼 그림이 보고 싶어져요.
사진은 기본적으로 너무 깔끔한 것 같아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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