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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의 묘미
    이런저런 2014. 1. 12. 01:05

     

    10년 전 추석 연휴에 춘천에 있으면서 쓴 짧은 글이 생각나서 읽어 본다.

     

     

                    길에서

     

     

          추석 닷새 연휴 첫날

          토요일 아침 연구실.

     

          산은 쓸쓸해서 이제는

          혼자선 안 가지만

          이 아침

          북한산이 아득히 다가선다.

     

          헬렌이 보고 싶다. 몇 년 전

          길 가다 만나

          잠깐 몇 마디 주고 받은 적 있는.

     

          틈틈이 읽던 책 한 권 들고

          명동 길로 나선다.

     

          그저 몇몇인 것을.

     

     

     

    낙서하듯 이 글을 내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리고 명동으로 걸어 내려가던 생각이 난다.

    그날 아침의 그 느낌이 되살아 난다. 그냥 기억 속에서만 회상 하는 것과는 역시 다르다.

     

    기록해 둔다기 보다는 표시해 놓은, 이런 글의 묘미를 알 것 같다. 느낌 대신 적어 놓은

    느낌의 힌트나 제목이 오히려 더, 그때를 다시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누가 또 생각난다. 저 때의 '몇몇'에는 없었던, 그 후 5년쯤에 새로 알게 되고 '조금' 친해진

    그 사람은 지금의 내 '몇몇'에 들까. 말하자면, 최근에 읽은 좋은 소설이나 작가의 인상이

    더 선명한, 그런 건가.

     

    "위에 떠 있는 것들은 가벼운 것들"이라고, 생각나는 빈도가 비중에 비례 하지 않는데 대해

    변명처럼, 엊그젠가, 쓰기도 했지만, 가벼운 것이라고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역시 아니란

    생각이다. 아무래도 난, "기절한 울새 한 마리 다시 제 둥지에 데려다 주기만 해도 나는 헛

    산 게 아닐 거다"의 에밀리 디킨슨 쪽인 것 같다.

     

    고향처럼 그리워하는, 그런 풍경 또한 몇몇 떠오른다.

     

    그저 몇몇인 것이, 실은, 비밀로 하고 싶을 정도로, 참으로 만족스럽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이다.

     

    일상이 더없이 단순하다 보니 예전의 낙서에다 또 낙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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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란편지2014.01.12 09:39 

      노루님의 몇 편의 시를 감상해 본 바로는 '단가'의 느낌,
      혹은 세속을 떠난 옛 선비의 여유로운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 '몇몇'에 대해 아주 깊이 공감합니다. 사실은 몇몇이 아니라면, 생활이 생활 같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제가 사는 곳도 밤낮없이 조용한 산기슭인데 시내에서 이 아파트로 돌아오면 드디어 제정신인 것 같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자꾸 깊이 들어가시는 노루님을 느낍니다.

      • 노루2014.01.14 00:45

        '밤낮없이 조용한 산기슭'이라, 가장 좋은 데에 사시네요.

        제 홈페이지의'자유게시판'에 올렸던 저 글은, 쓰게 된 것도 그랬지만 10년 지나서 읽어볼 수 있는
        것도 제 경우엔 다 컴퓨터 덕이지요. 그런데 저 글을 저는 그냥 '짧은 글'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시라고 하기에는 실은 '생략형 산문'을 시처럼 줄 갈라 쓴 글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ㅎ

        전에 (벌써 10년이 넘었네요),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갓 등단한 20대 초반의 여성 시인과 온라인 게시판에서
        주고 받은 대화가 생각나네요. 산문시를 독자로선 그냥 산문이라고 해도, 그렇게 읽어도 된다고 했더니, 그
        시인은 그건 안 된다고, 산문시를 산문이라 할 수는 없다고, 그래서 저는 또, 그건 시적인 산문의 영역을 너무
        좁히는 게 아니냐고, ....

        시와 산문에 대해서 이런저런 각도로 생각해볼 수 있는 재미있는 대화였는데, 제가 그 시인의 스승의 친구인
        게 우연히 드러나자 그만 끝나고 말았지요. "내게는 시인에게서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서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는 좋은 기회"라고 댓글을 썼지만, 아쉽게도, 그 시인은 '스승의 친구'되는 사람의 생각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접지 못하는 것 같더라고요. 저한테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 참 아쉽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이해는 되는 것이, 제자가 스승인 자기의 시에 대한 시 감상 글을 그 대학의 신문에 실었다고
        "제자가 건방지게 ..."라고, 어떤 시인이 제게 말하는 걸 듣고 놀란 적이 있었거든요.

      • 파란편지2014.01.14 08:52 

        아무리 유명한 작가이고 그에 관한 작가론이 있다 해도 독자들은 독특한 관점으로 읽기 마련이고 작품은 그래서 그 값어치가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창작의 의미조차 줄어들 것 같기도 하고......
        저 같아도 그 '대화'의 중단에 아쉬움, 안타까움을 느꼈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새로 탄생한 시인과의 대화였는데......

      • 노루2014.01.14 10:42

        그렇지요. 저마다 '독특한 관점'에서 누구를 좋아하듯, 독자가 글에서 느끼는
        매력도 그럴 것 같아요.

        그 시인과는 그 이전부터도 알고 몇이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도 한두 번 함께
        했었지요. 그래서 더 어려워하는 것 같더군요.

    • eunbee2014.01.12 19:40 

      홈페이지나 블로그에나 무언가를 기록해 둘 수 있는 공간이라서 소중해요.
      예전에 쓴 내 글을 뒷날 다시 꺼내 읽어보면, 그때 그날이 떠오를 뿐만아니라,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맙고 반가운지요.

      교수님께서는 춘천 명동거리에서의 추억도 많으신듯해요.
      저도 그 거리 분위기 조금은 알아요.
      후평동에 사는 제 남동생네집에도 가야하는데, 올겨울엔 이러고 있네요.

      그저 몇몇인(매우 소중한, 그것으로 잔이 넘치는) 그 보배로운 기억의 자리, 기억속 인연,
      교수님의 숨겨두고픈 보물들을 엿보게 되어 제 마음도 낭만스러움에 살짝 흔들려요.
      교수님이 흔들림 숨기는 그 추억들, 저는 왜 아련한 설렘이 이는지요.ㅎㅎㅎ

      노루2014.01.14 03:14
      명동보다도 그리로 걸어내려 가던 길에 생각나는 것들이 많아요.
      <바라>라는, 특별한 고성능 고급 스피커 세트가 있던, 고전음악 찻집도
      그 길가에 있었고요. 늦봄이나 초여름 집 담장 너머의 보라빛 라일락꽃이나
      담장에 느러진 줄장미꽃들도 생각나고요.

      위에 '조금' 친해진 사람이라고 썼지만, 일 년에 한두 번 만나기도 어려운,
      오래된 친구와 달리, 그냥 일상에서 자주 보게 되고 그러면서 늘 호의로
      대해주는 사람들이 어쨌든 '현재의 주위 사람들'이니까요.
    • sellad (세래드)2014.01.14 17:19 

      "단순한 일상" ........,그도 축복 입니다. (단순하지 않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 노루2014.01.14 23:18

        사실은 지금의 단순하고 평온한 일상이 될수록 오래 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내면상으로 단순하지 않게 만들어 볼 시도를 할 수 있는 건 정말 축복이고요.
        일상은 단순한데 평온함이 깨지는 일이 없기를 또 바라고요.

    • 새파람2014.01.16 08:09 

      글이 부족한 전 늘 사진만으로 남겨 두는 낙으로 살죠^^
      단순함을 이리 글로 남기시는 건 멋진 인생이라 봅니다 ㅎㅎㅎ

      • 노루2014.01.16 22:56
        원래 나돌아 다니기를 좋아하는데 사정이 있어서 그러지를 못하고
        나들이라곤 그저 두세 시간 테니스나 치고 오는 거다 보니
        낙서처럼 몇 줄 쓸 거리조차 안 생기네요. ㅎ
    • 베로니카2014.01.22 16:43 

      저그림이 참 말갛고 좋으네요
      창가에 햇살이 쏟아지고
      ..

      노루2014.01.22 23:50
      저도 저 그림이 '말갛고' 밝아서 좋으네요.
      나무 탁자인지 장(hutch)인지의 질감도 따뜻한
      친근감을 주고요.
      • 베로니카2014.01.24 22:58 

        어느 저명하신분이
        "예술이란 눈속임이다"란말씀이 생각납니다
        어느때는
        저도 내마음에서 울어나와서 그리는그림이아니라
        어케하면 좀 잘보일려하고 예삐보일려하는 붓터치가는곳마다 그리하니
        절로 질릴때가있어요 ㅋ
        그런거생각하면 젊은날 그린그림이 좋은것같기도.
        우중충 추상화도아니고 먼생각으로 그렸는지..
        그림도 세월가니 타인의눈에 비춰질그런그림으로 바뀌는가
        편안한그림으로 바뀌는가 통 그러데요 ..

      • 노루2014.01.25 11:45

        여기저기서 온갖 사진들을 많이 보게 되다 보니
        새삼 그림이 보고 싶어져요.

        사진은 기본적으로 너무 깔끔한 것 같아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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