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보 시인의 시 "한가로운 날"시 2022. 4. 16. 07:54
임보 시인의 한가로운 날처럼
나는 날마다 한가하다
그런데다 그 한가로움과 평화를
표현하는 것마저도 그의 시를 빌린다
시인이 덜 민망해하실까
한가로운 날 / 임보*
그제는 혼례식에 참석했고
어제는 장례식에 다녀왔다
오늘은 아직 일이 없으니
몇 줄의 글을 읽으며 빈둥거려도 된다
내 자리가 높지 않아 찾아오는 이 없고
내 가진 것 많지 않아 욕심내는 이 없고
각별히 사랑하는 이 없으니 시새움 걱정 없고
지나치게 미워하는 이 없으니 원망에도 자유롭다
아침엔 세 평의 채소밭에 나가 물을 주고
낮에는 뜰의 풋고추, 씀바귀 잎을 따다
향긋한 된장에 찍어 물 만 밥을 씹는다
저녁엔 잘 익은 매실주 둬 잔이 기다리고...
늙은 소나무엔 아침저녁 까치들이 드나들고
감나무 매화나무엔 종일 참새들이 드나들고
호박덩굴엔 호박벌, 능소화엔 개미 떼들
찾아오는 사람은 없어도 온종일 손님들로 북적댄다
세상에 지천인 이 평화를
나누어 가질 사람이 없어 민망하다.
- 임보 잠언시집 < 山上問答 > 2016
* 오늘 [임보 시선]에서.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Jane Kenyon 의 시 "제가끔의 색깔로" (0) 2022.04.28 시란 무엇인가? (0) 2022.04.21 Victoria Chang 의 시 "그 음악" (0) 2022.04.13 누구나 썼을 것 같은 Mary Oliver 의 시 한 편 (0) 2022.04.03 임보의 시 "어떤 목련"과 천리포 수목원 (0) 2022.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