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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강의 시 세 편 더
    2024. 10. 16.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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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2013)를 광고하는 게 된다는 핑계로, 며칠 전 포스팅에 이어, 거기 숲지기님 댓글의 제안을 따라, 같은 시집에서 세 편의 시를 더 올리기로 한다.

     

     

    마크 로스코와 나 2

     

     

    한 사람의 영혼을 갈라서

    안을 보여준다면 이런 것이겠지

    그래서

    피 냄새가 나는 것이다

    붓 대신 스펀지로 발라

    영원히 번져가는 물감 속에서

    고요히 붉은

    영혼의 피 냄새

     

    이렇게 멎는다

    기억이

    예감이

    나침반이

    내가

    나라는 것도

     

    스며오는 것

    번져오는 것

     

    만져지는 물결처럼

    내 실핏줄 속으로

    당신의 피

     

    어둠과 빛

    사이

     

    어떤 소리도

    광선도 닿지 않는

    심해의 밤

    천 년 전에 폭발한

    성운 곁의

    오랜 저녁

     

    스며오르는 것

    번져오르는 것

     

    피투성이 밤을

    머금고도 떠오르는 것

     

    방금

    벼락치는 구름을

    통과한 새처럼

     

    내 실핏줄 속으로

    당신 영혼의 피

     

     

     

     

    Mark Rothko, No, 2, 1962

     

     

     

     

    조용한 날들 2

     

     

    비가 들이치기 전에

    베란다 창을 닫으러 갔다

     

    (건드리지 말아요)

     

    움직이려고 몸을 껍데기에서 꺼내며 달팽이가 말했다

     

    반투명하고 끈끈한

    얼룩을 남기며 조금 나아갔다

     

    조금 나아가려고 물컹한 몸을 껍데기에서

    조금 나아가려고 꺼내 예리한

    알루미늄 세시 사이를

     

    찌르지 말아요

     

    짓이기지 말아요

     

    1초 안에

    으스러뜨리지 말아요

     

    (하지만 상관없어, 내가 찌르든 부숴뜨리든)

     

    그렇게 조금 더

    나아갔다

     

     

     

     

    오이도 (烏耳島)

     

     

    내 젊은 날은 다 거기 있었네

    조금씩 가라앉고 있던 목선 두 척,

    이름붙일 수 없는 날들이 모두 밀려와

    나를 쓸어안도록

    버려두었네

    그토록 오래 물었던 말들은 부표로 뜨고

    시리게

    물살은 빛나고

    무수한 대답을 방죽으로 때려 안겨주던 파도,

    너무 많은 사랑이라

    읽을 수 없었네 내 안엔

    너무 더운 핏줄들이었네 날들이여,

    덧없이

    날들이여

    내 어리석은 날

    캄캄한 날들은 다 거기 있었네

    그곳으로 한데 흘러 춤추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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