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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옛 장면 하나를 떠올려준 시는 그거로도 족하다시 2020. 9. 10. 06:56
내 블로그에서 뭔가 찾아보다가, 예전 포스트 "3, 4월의 사진 몇 장" 에서
Ogden Nash 의 "The Perfect Husband"를 다시 읽게 됐다. 우연히 얻게
된 Nash 의 시집 "Versus" 표지 사진을 보여주면서 거기 실린 이 시를,
번역도 해서 원문과 함께, 덧붙인 거였다. (그러니 원문은 그 포스트에.)
완전한 남편 / Ogden Nash
당신의 입술 연지가 너무 짙을 때
그이는 말해줍니다,
그리고 당신의 비죽이 내민 엉덩이를
거들로 조이는 걸 도와줍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전에는 그런 적이 없고 그저 'lipstick' 'stick' 운을
살려 쓴 Nash 풍의 익살 시로만 즐겼는데, 이번엔, 문득, 첫애 하나
뿐이던 우리 젊은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평생 한두 번이나
생각날지 모를 일이 이젠 이 시를 보면 저절로 생각날 테니, 내게
이 시는 그거로도 족하다.
그 장면이란 게 별 거 아니다. 아내가, 서너 살배기 첫딸을 데리고
였나, (일리노이대 대학원생) 아파트 뒤켠 어린이 놀이터에서 이웃
우리 한인 친구네 부인과 이야기 중에 그 부인이 아내의 썬 드레스
차림이 이쁘고 어울린다고 한마디 하고 아내는 그게 내가 권해서
나 때문에 입어본 거라고 대답했다던가, 아니면 나도 그 자리에
있었던가, 그게 다다. 어울리고 이쁠 거라고 내가 아내에게 말한 건
사실이고 그래서 낸 아내의 용기가 반쯤은 역할을 했을 거다.
그런데, 내 머릿속에 숨어있던 빛 바랜 사진 한 장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 나오게 만든 것은. '완전한 남편'이란 시의 제목이었을까, 어쩌면
본문의 한두 단어였을까.
나만의 시로 읽게 하는, 읽으면서 그래서 나의 시 '독자의 시'가 되게
하는 그런 시를 좋아하는데, 장황한 묘사나 무리한 은유보다는 말수
적은 시가 내게는 그런 면에서 좋아지기가 더 쉬운 것 같다.
말이 필요 없이, 보기만 해도 그 맛이 느껴지는 과일 같은 시, 엄지손에
잡혀 그 자체로는 무덤덤한 감각인 오래된 메달 같은 시, 새들의 소리
없는 비상 같은 시, '바로 그것이 아닌 그것 같은(그처럼인),' 사랑을
서로 기대는 또는 같은 방향으로 기우는 풀들로 말하는 시,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인 시, Archibald MacLeish 의 시 "Ars Poetica" (the
art of poetry) 부분이 말하는 그런 시가 그래서 더 편안히 읽힐 것 같다.
Ars Poetica (부분)
A poem should be palpable and mute
As a globed fruit,
Dumb
As old medallions to the thumb,...
A poem should be wordless
As the flight of birds....
A poem should be equal to:
Not true....
For love
The leaning grasses and two lights above the sea—
A poem should not mean
But be.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Qu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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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nbee2020.09.10 09:13
그간의 세월(블방에서 뵈 온)에
제게 느껴졌던 교수님이
이 포스트에 오롯이 들어 있어요. ㅎ
오늘도 한시간 후엔
US오픈 테니스 8강 경기에...^^-
노루2020.09.11 00:42
ㅎ ㅎ 이 포스트에서 뭔가 또 들킨 게 있나봐요.
그 세월이 eunbee 님이며 여러 좋은 분들 덕분에
참 괜찮았다고, 생각날 때마다 흐믓해합니다.
어쩌다 지난날 포스트를 다시 보게 되면 본문이야
어떻든 거기 가볍게 주고받은 댓글들이 따스하고
유쾌해서 그런 포스트들의 모음을 따로 편집해도
좋겠다 싶더라고요.
오늘 저녁 여자 준결승전을 인터넷에서 그냥 볼 수
있도록 ESPN 의 선처만 바라고 있습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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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포아줌마2020.09.11 22:32
정말 완전한 남편' 이네요.^^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인 시' 들에서
놀랍게도 줄줄이 이어지는 연상들.
젊음이 다 쇠잔한 날들에야
같은 시에서 젊음의 물기 들을 떠 올리는 것.....
^^*-
노루2020.09.12 03:29회상록을 쓰기라도 하듯이 앉아서 한참 생각하면
떠오를지 모를 장면들을 문득 불러다주는 것들이
있는 게 나쁘지 않더라고요. '젊음의 물기'에 메마른
마음이 잠시 젖어보는 것 ....
이렇게 쓰고 있는데, 빨간 표지의 "Introduction to
Statics"란, 뒷표지 오른쪽 아래 구석에 아내의 이름이
그녀 특유의 필체로 써 있던, 그 책이 생각납니다.
직장의 study group 에 끼기로 한 그녀에게 text 인
그 책을 사도록 (원서 서점) 범문사로 안내한, 결국
우리의 첫 데이트가 된, 그날을 늘 생각나게 하던 그
책은 10년 전 그만 분실된 우편물 속에서 사라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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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하늘2020.09.13 11:02
'말이 필요 없이,
보기만 해도 그 맛이 느껴지는 과일 같은 시'
이 말씀이 참 가슴에 와 닿습니다
저는 시를 공부한적이 없어서
詩에 대하여 뭐라고 말씀 드리기도 뭣하지만...
노루님을 통해서 詩에게 한발 다가서는 기분입니다.-
노루2020.09.14 01:13
아치볼드 메클리시의 시구를 보다 정확히 번역하기
어려워 그냥 그렇게 썼습니다. 종종 하는 얘기지만,
알맞게 잘 익은 과일을 보면 먹고 싶어지는 게 인문학이나
과일 공부를 한 사람이나 그런 게 아니잖아요. ㅎ
우리처럼 시를 공부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자유롭게, 선입견 없이, 시를 즐기기 쉬운 면도 있는
것 같아요. 시든 산문이든. 내용에서든 표현에서든,
읽는 즐거움을 주는 글은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요.
여름하늘님 글들이 다 참 좋아요. 아마, 자연스럽게
'술술 쓰셔서' (맞지요? ㅎ) 더 그런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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