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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날
    짧은 글 2012. 11. 30. 23:28

     

     

    아이가 혼자 잘 논다.

    커다란 프라스틱 펀치볼을 북처럼 두드리며

    탁 트인 이 방 저 방 왔다 갔다 하더니

    지금은 소파에 앉아서 두드린다. 탁탁 타다닥 탁탁 타다닥.

     

    문을 열어 놓는 화장실에 가 변기 속을 본다.

    암탉 앉았던 자리에 달걀 두 알처럼

    물 속 한가운데 얌전히 들어앉은 걸 본다.

    기특하고 귀여운 게 달걀뿐이랴. 물을 내린다.

     

    아이의 점심을 만들 시간이다.

    스파게티 물이 끓는 사이 달걀을 프라이하는데

    어느 틈에 다가와 서서 보고만 있던 아이가 그런다,

    "둘이 같이 하니 참 좋다."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이 경쾌하다.

    24시간 클래식의 CPR* 채널이, 알아서 늘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준다. 창 밖으로 늘

    뒤뜰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듯.

     

     

    *CPR: Colorado Public Radio.

     

     

     

     

     

    Kandinsky, Conc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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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헬렌2012.12.01 00:40 

      아이가 참 말을 이쁘게 해요.. '둘이 같이 하니 참 좋다..'
      뭐든 같이 하면 참 좋아요.
      이렇게 혼자서도 잘 놀고, 말도 예쁘게 하는 순한 아이.. 얌전한 닭처럼 기특한 일을 하는 순한 아이..
      밝고 경쾌한 바이올린 협주곡처럼 아름다운 일상을 선물하네요.

      혼자서 잘 노는 아이가 얼마나 축복인지요^^ 방실방실 잘 웃고 뭐든 잘 먹고 그러면 참 예뻐요.
      뭣 때문인지 혼자서 깔깔 웃는 아들 녀석 웃음소리를 들으면 저까지 기분이 좋아져요.
      그런데 멀쩡히 잘 자고 일어나서 괜히 툴툴거리는 녀석 보면 아침부터 제 기분이 영 안좋아져요..
      그거 보면서 저 어렸을 때 생각이 나면서 울엄마는 참 힘들었겠다..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 너무 까칠하고 잘 안웃고 잘 안먹었거든요. 남을 즐겁게 못해주는 그런 아이였어요..

      • 노루2012.12.01 02:26 
        자기가 뭘 했다는 건지 '둘이 같이 하니 좋다'고. ㅎ ㅎ

        헬렌님이 기억하는 것과 어머님께서 기억하시는 게 같지 않을 걸요.

    • 깜이河河2012.12.02 00:25 

      행복한 어느날...의미있게 읽었습니다
      경쾌한 클래식 음악과 뒤뜰 아름다운 풍경이 매일 노루님 곁을 지켜주네요
      아이도....!
      늘 내곁에 있기에 고운줄 모르고 있다가 문득 있어줘서 고맙다고....새삼 느낍니다
      행복한 어느날
      행복 만드시는 노루님 ...^^

      • 노루2012.12.03 03:14 
        행복이 늘 밑져주는 것 같아요.
        5분의 불행한 느낌은 톡톡히 값을 치르게 하는데
        한나절 행복은 거저처럼 느끼게 하니요.
    • 안나2012.12.04 16:46 

      실제로 같이 하는것이 없어도,
      아마도 머리속으로는 함께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어요.

      가끔, 노루님의 모습과 생각은 초월한 사람의 무엇이 느껴져요.

      • 노루2012.12.05 01:30 

        요시가와 소설의 영역판 'Taiko'에서는, 마음을 슬프게, 아프게,
        어둡게, 또는 약하게 하는 일들에 대한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대응 방식이 detachment 였다고 쓰여 있네요.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으려고 사실 detachment 를 잘 써먹어요.
        소설의 일본어 원본에서는 detachment 가 '초연' 또는 '초월'이었을
        것 같은데, 내 경우는 그냥 '떼(내)기'의 뜻으로요.

        뛰어넘거나 의연하기는 힘들어도, 그냥 생각에서 떼어내기는,
        생각 안 하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으니까요.

        아이들의 천진난만을 자주 접하는 것, 좋은 것 같아요.

    • eunbee2012.12.06 03:37 

      품격 높은 단편을 읽은 기분이에요.
      너무 아름다워서 제 눈가가 뜨근해졌어요.

      '둘이 같이 하니 참 좋다.'

      그말을 할 때의 천사같았을 아이표정이 그려져요.
      교수님은 어쩜 글을 이렇게 쓰실 수가 있을까요.

      '기특하고 귀여운 게 달걀 뿐이랴.'
      아, 이런 시선(사물이나 상황에 대해)을 가질 수 있다니...

      --교수님 글을 닳도록 읽고 있어요.^^
      답글까지도요.
      이제 자야겠어요.

      • 노루2012.12.07 02:08 

        고마워요, eunbee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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